김정훈 판사의 판결문은 논리적 정합성이 없다 – 5.18 헬기 기총소사 여부와 관련 전두환의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사건 판결문 전문을 읽고

출처: KBS

2020.12.07.

지난 주에 광주지법 김정훈 판사가 조비오 신부 증언이 사실이 아니라고 회고록에 쓴 전두환에 대해 허위 사실 적시에 따른 사자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선고한 판결문을 비판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5.18 헬기 기총소사, 광주지법 인정 판결을 보며>

http://road3.kr/?p=39732&cat=161

 

지난 주의 글은 언론에 보도된 기사 내용만 보고 쓰다 보니 판결문의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지 못했었다. 최근 판결문 전문을 입수해 정독해 읽어 보았다. 신문기사로 접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김 판사의 판결문은 모순으로 점철된 정치적 판결이라는 느낌이 더욱 들었다.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전두환 1심 판결문 전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98129

 

1. 1980년 5월 21일에 광주의 5 곳 이상에서 기총소사가 있었다?

 

판결문 P4에는 유죄 선고하는 이유로 범죄사실을 적시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에 아래와 같은 문구가 나온다.

 

“1980년 5월 21경 광주 불로천변, 양림동, 대림동, OO시장, OO병원 등 일대에 헬기 사격이 있었고,”

 

이는 P40에 나오는 김 판사의 판단과 다르다.

 

“(조비오 신부)자신이 OO동성당에서 이를 목격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는 헬기에 의한 사격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김 판사는 조비오 신부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는 근거로 조비오 신부가 OO동성당 이외 다른 곳에서는 헬기 사격 소리를 듣지 못한 점을 들었다. 그런데 전두환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이유로 5월 21일, 광주의 5곳 이상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적시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조비오 신부의 주장과 정면 충돌한다.

 

불로천변을 뺀 양림동, 대림동, OO시장, OO병원은 주택과 건물이 밀집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생활하는 공간이다. 이런 곳에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사망자와 부상자가 다수 발생해야 하고, 주택과 건물, 도로에 수많은 헬기 기관총 탄흔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의 부상자나 사망자도 없으며, 어디에도 기관총 사격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헬기에서 떨어진 수백, 수천 발의 탄피들이 광주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어야 하는데 발견된 헬기 기관총 탄피도 없다.

그리고 5곳 이상에서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는데 목격자가 고작 16명이고, 그 중에 8명의 증언은 김 판사 스스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헬기 기총소사 목격 증언자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조사할 때는 불과 6~7명 밖에 없다가 오히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인 최근에 와서야 16명이 나왔다.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P45에서 김 판사는 최O춘(간호조무사)의 광주OO병원의 헬기 기총사격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를 홍O국의 “광주OO병원에서는 헬기 사격이 없었다”라는 진술을 들었다. P45에서는 OO병원에서 헬기 기총소가가 없었다고 판단해 놓고 선고 이유(범죄 사실)를 밝히는 P4에서는 왜 OO병원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적시했는가?

 

2. 왜 당시 그 시각 전남도청 앞의 장갑차 기관총 발포 사실은 말하지 않는가

 

판결문에는 조비오 신부가 증언한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시각의 전남도청 앞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시민군 피해만 중점적으로 서술하는 반면 시민군의 계엄군에 대한 공격과 계엄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아 형평성이 결여되어 있고 객관적이지도 못하다.

시민군의 피해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시민군의 공격이나 계엄군의 피해는 기술하지 않는 이유가 의심스럽다.

조비오 신부의 증언의 신빙성을 판단하려면 당시 그 시각의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의 상황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알고 이를 참조하여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주변 상황과 부합하는지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김 판사는 이를 적극적으로 행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 그 시각의 전남도청, 전일빌딩 등 금남로 일대의 상황은 조비오 신부의 증언과 부합하지 않는다.

아래는 판결문 P21에 나오는 5월 21일 12:00부터 16:00까지 전남도청 앞 상황이다.

 

“14) 병공수여단은 5월 21일 12:00경 J대학교 앞에서 차량 공격을 시도한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운전자 등이 사망하였고, 을 공수여단은 같은 날 13:00경 전남도청 앞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다가오는 시위대에게 발포하고,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들이 시민들을 상대로 M16 소총을 이용하여 조준사격을 실시하여 많은 시민들이 사망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한 발포는 인근 카톨릭센터 등에서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5년 7월 18일(김영상 집권 시절)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가 발표한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보고서에 나타난 5월 21일 오후 1시 이후의 도청 광장에서 벌어진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 보고서의 P97~105를 보면 당시의 전남도청 앞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5.21. 08:00 : 전남도청 앞에 수만 명의 시위대가 사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시위.

•10:00 : 시위대 대표 4명, 도청에서 장형태 도지사와 면담.

•11:00 : 장형태 도지사 시위대 앞 연설 포기하고 헬기로 시민 자제 요구 방송.

•12:00 : 공수 부대 장갑차 2대와 함께 도로에 횡대로 포진하여 시위대의 도청 진출 저지,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의 백여 대 차량으로 공수부대 저지선 압박.

•13:00 : 시위대가 계엄군 장갑차에 화염병 투척,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 공수부대의 저지선 무너지고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 사망. 시위대 장갑차의 갑작스런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 건드려 공중 발포. 도청 직원들이 선무활동의 일환으로 스피커 통해 애국가 방송하며 해산 호소.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 쪽으로 돌진해 오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하여 버스 운전자 1명 사망.

•13:30 : 시위대쪽에서 장갑차 1대가 도청으로 돌진하자 경계 중이던 공수부대원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여 청년 1명 피격. 공수부대의 발포로 후퇴하였던 시위대가 다시 카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임.

•13:00~15:35 : 시위대, 광주 인근 전라 지역 파출소, 지서, 경찰서, 광업소, 화약고, 한국화약 등에서 카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 정, 실탄 13만여 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백 7십여 발 탈취.

•14:45 : 61항공단 UH-1H 헬기 전남도청 상공에서 공중 정찰 중 시위대의 대공사격으로 6발 피격.

•14:50 : 시위대 장갑차 전남도청 광장쪽으로 돌진, 공수부대 발포로 후퇴.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과 신관, 전남일보, 수협 도지부, 상무관 등 인근 건물 옥상에 병력 배치하여 도청 부근 접근하는 시위대에 총격.

•15:00 : 남평지서에서 무기 탈취한 시위대가 충금지하상가 사거리 도착.

•15:15 :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천명 모여 칼빈과 실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

•15:50 : 시위대가 전남의대 오거리에서 전남도경 쪽으로 사격하면서 이동.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하던 헬기 시위대 대공사격 6발 피격.

•16:00 :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 30여 정 칼빈 분배.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LMG 2정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군 헬기 향해 사격.

윤흥정 전교사령관, 공수부대 전남도청 철수 지시.

•16:30 : 전남도청 상황실 폐쇄.

•17:00 : 공수부대 전남도청에서 철수 시작.

•17:15 : 전남도경 상황실 폐쇄, 경찰 병력 철수 시작, 전경들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철수.

•20:00 : 전남도청 시민군에 의해 접수됨.

 

위의 김영삼 정권 시절 조사된 보고서를 보면, 조비오 신부가 시위대 장갑차의 갑작스런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려 공중에 발포한 기관총 소리를 듣고 상공의 헬기에서 기관총을 쏜 것으로 착각했을 수 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조비오 신부가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했다는 시간과 장갑차 기관총 발포 시간대가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김 판사는 이러한 합리적 추론을 할 수 있음에도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장갑차의 기관총 발포가 있었던 사실을 기술하지 않고 있다.

 

3. 쟁점을 ‘헬기 기총소사’에서 ‘헬기 사격‘으로 자의적으로 변경

 

판결문 P28에서 김 판사는 다음과 같이 쟁점을 ‘헬기 기총소사’에서 ‘헬기 사격’으로 자의적으로 옮기고 있다.

 

“덧붙여 살펴보면, 이 사건 회고록 중 쟁점 부문에서는 피해자의 주장을 ‘헬기의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기재하였으나,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해자의 진술은 헬기에 의한 사격에 중점이 있고, 피고인도 ’헬기에 의한 사격‘ 사실 자체가 없었다는 취지로 주장하고 있으며, 이 사건 회고록의 전체 취지도 피고인의 주장과 같음으로 적시의 대상이 되는 사실은 ’헬기 기총소사‘가 아니라 ’헬기 사격‘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조비오 신부는 한결같이 헬기 기총소사를 주장했으며,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소리를 들었고, 500MD의 장착된 기관총에서 발사되는 불빛을 보았다고 했다. 문제의 전두환 회고록의 조비오 신부를 비난하는 대목에는 조비오 신부의 ‘헬기 기총소사’ 주장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당연히 쟁점이 되는 부문은 ‘헬기 기총소사’이지 ‘헬기 사격’이 아니다. ‘헬기 기총소사’와 ‘헬기 사격’은 피해 규모나 피해의 참상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어 책임의 경중 역시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쟁점을 김 판사가 자의적으로 바꾸는 것은 답을 정해 놓고 끼워 맞추기 위한 술책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판결문 P 28~30에는 조비오 신부의 진술과 주장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진술과 주장 모두에도 조비오 신부는 ‘헬기 기총소사’를 주장하지, 헬기 (기관총이 아닌 M16 등 소화기)사격은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김 판사 스스로도 조비오 신부가 헬기 기총소사를 주장한 것을 알면서도 쟁점을 ‘헬기 사격’으로 슬그머니 틀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P40에는 김 판사 스스로 “① 피해자는 1989년 이래 사망할 때까지 1980년 5월 21일 500MD에 의한 기관총 사격이 있었고, 자신이 OO동성당에서 이를 목격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는 헬기에 의한 사격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그 총소리를 표현하는 어구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으나 이는 소리를 문자나 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오히려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는 사정이고, 피해자(조비오)가 목격했다는 총소리는 세 번의 연발 기관총 소리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 판사 본인 스스로도 조비오 신부는 일관되게 ‘헬기 사격’이 아니라 ‘헬기 기총소사’라고 주장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조비오 신부가 봤다는 500MD는 로켓포와 기관총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어 헬기의 문을 열고 M16 등의 다른 화기로 사격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따라서 ‘헬기 사격’으로 쟁점을 바꾸는 순간, 조비오 신부의 ‘헬기 기총소사’ 주장은 도리어 힘을 잃게 된다.

 

4. 목격자 진술의 자의적 채택(P35~50)

 

김 판사는 16명의 목격자 진술 중에 8명의 진술은 신빙성 없다고 기각하고, 나머지 8 명의 진술은 채택했는데, 채택하는 이유 설명에 합리성과 일관성이 없고 모순도 많다.

김 판사가 신빙성이 없다고 한 증언들은 대부분 헬기 기총소사에 의한 피해(사망자와 부상자)가 있다는 증언이다. 김 판사도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증언들을 모두 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채택한 증언들도 다른 증언에 비해 신빙성이 있다고 볼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데다 16개 중에 8개의 증언은 착각에 의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나머지 8개 증언들은 착각에 의한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김 판사가 채택한 증언 8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OO드 피OO(외국인 목사, 이하 P 목사)의 증언

“15:15경 광주 영공에서 헬기(500MD)가 군중들을 향해 사격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16:30분경 집으로 와 옥상에서 헬기(500MD)가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찍은 헬기 사진이 있는데 가운데 불빛이 보인다. 이 불빛은 기관총 사격에 의한 불꽃이 아니라 충돌방지등의 불빛임이 확인되었다. P 목사는 헬기가 군중들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했다고 했으니 헬기가 사격한 곳은 많은 군중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곳일 것이고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면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총소사를 받았던 곳에서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총소사를 받았다는 사람들도 없고 기총소사를 한 흔적도, 그 흔적을 본 사람도 없다.

김영삼 정권의 수사보고서를 보면, “15:15 :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천명 모여 카빈과 실탄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 16:00 :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 30여 정 카빈 분배.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LMG 2정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군 헬기 향해 사격.”이라고 나온다. P 목사가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그 시각 즈음에 시위대와 계엄군 간 총격전이 있었고(15:15), 시위대가 헬기를 향해 LMG(경기관총) 대공 사격을 했다. P 목사가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한 장소도 광주시내와 자택(양림동)으로 시위 군중이 몰려있던 전남도청과 멀지 않은 곳이다. P 목사는 시위대와 계엄군의 총격전 소리와 시위대의 LMG 대공 사격 소리를 듣고 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한 것으로 착각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판사는 P 목사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며 증거로서 채택했다.

 

2) 김O기의 증언

“17:00 전후로 P 목사의 자택에서 P 목사와 함께 헬기가 사격하는 장면을 보았다. ‘드르륵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났고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M16을 자동 상태로 놓고 광주천을 향해 위협 사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O기의 증언과 수사보고서상의 시위대의 LMG 대공 사격 내용과 비교해 보면, 김O기는 시위대가 헬기를 향해 경기관총(LMG)을 쏜 소리를 듣고 이것이 헬기에서 쏜 사격 소리로 착각했음을 알 수 있다. 헬기의 기관총보다 LMG는 경기관총이라 소리가 작고 덜 육중한 느낌이 들어 M16을 자동으로 놓고 사격한 것으로 느낀 것이다.

이렇게 당시의 주변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목격자 증언들의 신빙성을 추론해 보면 답이 나오는데, 김 판사는 당시의 주변 상황을 기술하지도 않았고, 또 당시 주변 상황과 목격자 증언을 비교 분석해 보지도 않았다.

 

3) 정O만의 증언

”오후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있은 후 ‘땅땅땅’ 하는 소리가 나 공중을 보니 헬기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헬기 여러 대가 오르락내리락 하였고 직감적으로 헬기가 사격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다“

정O만은 헬기 기관총 사격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다. 시위대와 계엄군 간의 총격전 소리를 듣고 공중에 헬기가 있는 것을 보고 헬기 사격인 것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본인이 느꼈다는 것이지, 목격한 것이 아니다.

전남도청 부근 도로에서 목격했다고 했는데 당시 그 장소에는 수 만명이 운집해 있어 만약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면 최소 수 천명의 직접 목격자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헬기 기총소사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고작 땅땅땅 소리를 기총소사 소리로 느꼈다는 사람만 있다. 만약 그 장소에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기총소사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을 것이다. 사망자, 부상자가 1명도 없고 흔적도 한 곳도 없다. (기총소사 흔적이라는 전일빌딩의 탄흔은 김 판사도 5월 21일인 아니라 5월 27일에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4) 최O국의 증언

“광주 북구 자택 마당에서 14:00경 노란 비표를 한 헬기가 왼쪽에 장착된 7.62mm 기관총으로 ‘따다다다다’하는 소리를 내며 10초에서 20초 가량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

최O국은 502항공대 정비사로 복무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 목격한 헬기가 502항공대 소속 500MD라고 증언했는데 당시 502항공대 500MD 헬기는 가스 살포기를 장착해 기관총 사격을 할 수 없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최O국의 증언에는 헬기의 이동 방향이나 헬기 기총소사를 한 장소가 없는 등 증언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단순히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했다는 내용 밖에 없다.

김 판사는 이런 증언을 무슨 근거로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5) 홍O국의 증언

광주 동구 부근 도로에서 “13:00~14:00경 금남로 총격을 피하여 파OO호텔 통로로 걸어가고 있던 중 헬기(HU-1H)가 전남도청 쪽에서 광주공원 쪽으로 가다가 ‘두두두두두’ 하는 소리와 함께 20초 가량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

홍O국이 목격한 헬기는 HU-1H로 조비오 신부가 목격한 500MD와 다르며, 김 판사도 5월 21일에는 500MD에 의한 기총사격이 있었지, HU-1H에 의한 사격은 없었다고 판단했다. 홍O국이 헬기 종류를 불상이라고 했으면 몰라도 스스로 HU-1H라고 밝혔는데도 김 판사는 이는 홍O국이 헬기 종류를 착각했을 뿐이라며 홍O국이 목격한 헬기는 500MD일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홍O국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6) 최O용의 증언

광주 동구 호텔 사거리 부근 도로에서 “14:00~14:30경 헬기 1대가 ‘따르륵 따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Y 쪽으로 돌아 왔을 때는 헬기가 내렸다가 뜨는 것을 보았다.”

당시 5.21 13시경부터는 시민군과 계엄군이 교전을 하고 14:45경에는 시민군에 의해 HU-1H 헬기가 대공 사격을 받았는데, 14:30분경에 무장 헬기(500MD)가 내렸다가 다시 뜨는 일이 가능할까? 김 판사는 5월 21일에는 HU-1H에 의한 기총소사는 없고 500MD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 사격만 있었다고 판단했다. HU-1H는 인력 수송용이지만, 500MD는 승무원 2명의 공격 헬기로 인원 수송용이 아니다. 즉, 최O용이 본 헬기는 HU-1H였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전남도청 인근에 HU-1H를 타고 내렸다가 뜬 후에 시민군의 총격으로 헬기가 추락할 뻔 했다는 당시 지휘관의 증언도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최O용은 시민군의 헬기에 대한 대공 사격 소리를 헬기가 사격한 소리로 착각하고, HU-1H가 내렸다 뜨는 것을 보고 이 헬기에서 사격을 한 것으로 오인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7) 신O의 증언

광주 동구 자택 옥상에서 “13:00~14:00경 헬기가 소총보다 강한 ‘타타타타’하는 연발음을 내며, 사격하는 것을 보고 옥상 물탱크 뒤로 몸을 숨겼다.”

신O 역시 13:00~13:30경 시위대 장갑차의 갑작스런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려 공중 발포한 소리를 헬기의 사격으로 오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O의 자택은 전남도청과 가까운 거리(약 200m)에 있고, 기관총을 발포한 계엄군 장갑차는 전남도청 앞에 있었다. 그럼에도 신O은 장갑차 기관총에서 발포된 소리를 들었다는 진술은 없다.

 

8) 이O중 증언

광주 동구 OO동성당에서 “13:00경 조비오 신부와 함께 헬기가 불로교 다리 위에서 광주공원방향 하천 쪽으로 ‘탕탕탕탕’하는 소리로 사격하는 장면과 불꽃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다.”

이O중은 조비오 신부와 함께 헬기 사격을 봤다고 주장하지만, 조비오 신부는 이O중과 함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하지 않았다. 조비오 신부와 함께 OO동성당에 있었던 정O완 신부는 조비오 신부가 헬기가 사격하고 있다고 소리쳐 나가보았으나 헬기는 떠 있을 뿐 사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조비오 신부도 언급도 하지 않았던 이O중이 나중에 나타나 조비오 신부와 함께 OO동성당에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정O완 신부도 이O중과 함께 보았다는 진술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O중이 당시에 OO동성당에 있었는지, 그리고 헬기 사격을 조비오 신부와 함께 목격했는지는 의문스럽다.

 

5. <별지3>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목격자들의 목격 장소(호남동성당 외 4곳)

 

조비오 신부가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한 호남동성당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전남도청-전일빌딩을 관통하는 금남로 일대에는 당시 수 만명이 운집해 있었는데 어떻게 그 장소에서는 조비오 신부가 봤다는 헬기 기총소사 장면을 목격한 목격자가 1명도 없는 것일까?

4곳 중에서 1곳만 전남도청 인근이고 나머지 3곳은 호남동성당에서 금남로까지 거리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그런데 김 판사는 판결문 P47에서 “이 법원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목격자들의 목격 장소는 별지3 지도와 같은데, 그 장소들은 피해자가 목격한 OO동성당과 멀지 않은 곳이고…“라고 적시하고 있다.

조비오 신부가 목격한 지점인 호남동성당에서 직선거리로 북쪽으로 약 900m, 남쪽으로 약 1,200m, 남동동쪽으로 약 1,000m 지점에서는 조비오 신부가 본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데, 어떻게 400m 밖에 떨어지지 않는 금남로 일대에 운집한 수 만명은 이 헬기의 기총소사를 목격하지 못했을까?

 

6. 조비오 신부 주장의 신빙성이 있다는 억지스러운 자의적 판단(P40~42)

 

판결문 P40에는 “조비오 신부는 1989년부터 1995년까지 5년 동안 4회에 걸쳐 1980년 5월 21일 직접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그 이후에도 일관되게 같은 취지로 주장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일관되었으며, 증언 내용이 객관적 사실에 부합할까?

아래는 5.18재단에서 5.18의 주요 인물들을 면담하며 구술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5.18의 기억과 역사, 5. 천주교편(P100~105)>에 나오는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다.

이 증언은 김 판사가 인용하는 4개의 조비오 신부의 증언과 상이한 부분이 많다. 김 판사가 의도적으로 조비오 신부의 증언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조비오 신부측에 불리한 조비오 신부의 증언은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때 그 시각에 공중에서 “드르르륵” 소리가 난거야. 그러니까 다들 이게 뭔 소리냐고 다들 난리가 난거지요. 나가지 말라고 결정이 되자마자 공중에서는 총소리가 나니깐 이(영수)요한 신부님은 밖으로 나갔어요. 사제관 뜰 앞 정도로 나오고 나는 성당 밖으로 나오니까 헬리콥터가 남쪽에서 날아와서 불로동 쪽으로 가는데 불로교 쯤에서 올라오는데 높지도 않고 사람이 내려다보는 것이 보여요. 그렇게 가면서 “피익~드르르륵” 쏘는 거라. 처음에 났던 것도 그 소리였어요. 내가 얼마나 혼비백산했는지. 정말 혼이 날아갔지요. 그때는 호남동 성당이 기와가 이어진 담이었어.

그때 내가 그리 은신을 했지요. (헬리콥터는) 사직공원을 넘어서 월산동 쪽으로 넘어가.

“오메, 저놈들 진짜 쏘네.”

그 쏘는 것을 이(영수)요한 신부님도 본 거야. 어디에 대고 쐈는가? 누가 맞았는지 모르지만 쏜 것은 본 거지요. 그날 21일이야. 드르르륵 한 소리는 발포한 것은 도청 앞에서 발포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때가 1시 반부터 2시 반 그 사이 내가 역력히 기억하거든요. 거기서도 “드르르륵” 하는 소리가 났고, 공중에서도 발포한 (불빛과) 소리가 났어요.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총소리가 (불빛이) 났는데 처음 노골적으로 시민을 향해 발포한 시간이 21일 오후 1시라고 하더구만, 그러니까 맞아떨어져. 우리 사제회의는 그 소리를 듣고 다들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다 집으로 가셨지요.“

 

이 조비오 신부의 증언을 보면, 헬기의 방향은 남쪽에 불로교 방향(북쪽)으로 왔다가 서북쪽(사직공원, 월산동)으로 날아간 것으로 보인다. 조비오 신부는 첫 헬기의 사격 소리 ‘드르르륵’은 성당 안에 있어 소리만 들었지 헬기는 보지 못했고, 두 번째 기총소사는 소리와 함께 사격 장면도 목격했다고 말한다. 목격한 두 번째 헬기 사격시 헬기의 방향은 불로교(불로동)에서 북쪽 방향임을 알 수 있다.

500MD는 헬기 측면에 기관총이 장착되어 있어 헬기의 방향으로 기관총 사격이 이루어진다. 즉, 조비오 신부가 목격한 헬기 기총 사격은 사람들이 없고 주택과 건물이 없는 지역이 아니라 불로동의 주택가나 군중이 모였던 금남로 일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사망자나 부상자가 1명도 없고 그 일대에는 헬기 기총소사 흔적이 하나도 없을까?

<별지1. 피해자가 자필로 그린 헬기 사격 장면>의 헬기 사격 방향을 보면 남쪽에서 불로동(북쪽) 방향이 아닌 불로동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사격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 조비오 신부의 <5.18 기록과 역사 천주교편>에 나오는 증언과 다르다. 이를 볼 때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일관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조비오 신부는 이영수(요한) 신부도 기총소사하는 것을 봤다고 증언하지만, 정작 이영수 신부의 증언은 김 판사는 증거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김 판사는 도리어 호남동 성당에서 조비오 신부와 함께 봤다는 장O완 신부의 헬기 사격을 보지 못했다는 진술을 언급하고 있다. 장 신부의 헬기 사격을 보지 못했다는 증언은 조비오 신부의 증언을 부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 판사는 오히려 조비오 신부가 일관되게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주장하고 있음으로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조비오 신부가 자필로 그린 헬기 사격 장면을 보면 헬기는 사직공원을 향해 사격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직공원과 그 인근에는 헬기의 기총사격에 의한 흔적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사직공원에는 나무들이 많아 나무에 박힌 기관총 탄환이나 탄흔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1968년 김신조가 청와대 습격시 총격전으로 북악산 숙정문 근처의 소나무에는 아직도 그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하물며 1980년에 발생한 것이라면 그 흔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조비오 신부의 헬기 기총사격 증언이 사실임을 밝힐 수 있는 객관적 물증을 확보하는 일이 어렵지도 않은데도 왜 이런 작업들은 하지 않는 것일까? 옛 광주 교도소 부지에 수십 구를 암매장했다는 증언을 믿고 암매장 유골을 찾는다고 교도소 부지를 포크레인으로 뒤집어엎는 난리법석을 떨면서 그보다 훨씬 쉬운 사직공원에서 기총 사격 흔적을 찾는 것은 왜 하지 않는가? 김 판사는 조비오 신부측(검찰측)에 이런 노력을 했는지 왜 물어보지 않는가?

조비오 신부가 자필로 그린 헬기 사격 장면의 그림이 조비오 신부의 증언의 신빙성을 높이는 증거가 되려면 그 그림에 나타난 대로 피해 사실이 있는지 조사하여 물증을 찾으면 된다. 당시 사직공원 인근에 살았던 사람들의 피해 증언이 왜 없는지 김 판사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조비오 신부의 자필 그림을 조비오 신부의 증언의 신빙성을 높이는 증거로 채택하는 것이 말이 되나?

 

1995년 검찰수사보고서 P208에는 조비오 신부의 아래와 같은 또 다른 진술 내용이 있다.

“조비오 신부가 5.27 헬기 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란은 검찰조사에서 부근 건물 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 사격에 의해 다쳤다고 진술하였으며..”

검찰에서의 위와 같은 조비오 신부의 진술이 사실과 다른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은 조비오 신부의 다른 증언들도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는 근거가 됨에도 김 판사는 이런 조비오 신부의 증언과 그 증언이 부정된 사실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P48에는 아래의 내용이 나온다.

“④ 그들의 진술은 직접 헬기의 사격을 목격했다는 진술과 소리를 듣고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진술이 혼재되어 있고, 헬기 사격으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가 있었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지 않다. 헬기 사격으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의 증명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들의 진술이 과장되었다고 보기 어려움으로, 이러한 사정은 그들의 진술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진술의 신빙성이 높다는 이유가 진술이 과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단순히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진술이면 신빙성이 가장 높은 것이 되는가? 사망자와 부상자 증명이 부족한 상황이면 더 구체적인 설명이 있고 이 진술이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면 신빙성이 높은 것이 아닌가? 헬기에 의한 사망자와 부상자가 있었다면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다소 부정확하거나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일부 있더라도 증언의 신빙성이 높아진다고 보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런데 반대로 김 판사는 헬기 사격에 의한 사망자와 부상자의 증명이 부족한 것을 되레 목격자 진술의 신빙성을 높이는 이유로 보고 있다.

 

김 판사가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너무나 어이가 없다. 조비오 신부의 증언 내용이 사실이라는 객관적 물증은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도리어 조비오 신부의 증언과 충돌하는 증언들이 많은데도 조비오 신부가 일관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조비오 신부의 증언의 신빙성이 있는 증거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인가?

 

7. 계엄군(항공 관련 군관계자)의 진술과 자료를 취사선택해 자의적으로 추정하여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판단

 

P51~P57에는 당시 계엄군에 참여했던 군관계자의 진술들이 나온다. 주로 항공 관련 군관계자들로 헬기의 조종사, 정비사, 항공대 책임자들의 증언이다. 이들의 증언에는 헬기가 무장하고 비행한 적은 있지만 헬기에서 기관총 사격은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헬기와 관련된 모든 군관계자들 200여명이 지난 40년간 한결같이 이와 같이 증언하는데도, 김 판사는 이들의 증언 중에 헬기가 무장했다는 사실, 상부로부터 위협사격이나 자위적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헬기 사격이 실제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만약 실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40년이 지나고 공소시효도 지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인데 200여명 중에 1명이라도 양심 선언하는 사람이 없을까? 200명 중에는 호남 사람이나 진보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단 1명도 없겠는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태까지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당시 헬기 관련 군관계자 200여명을 포함한 계엄군 중에 단 1명도 나타나지 않을까? 김 판사는 당시 계엄군에 참여했던 사람 중에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왜 1명도 나오지 않는지 설명해 보시라.

 

8. 5월 22일 08:30분의 헬기 사격 지침 하달 문서가 조비오 신부 증언을 뒷받침한다고?

 

김 판사는 (P57) 헬기 사격을 명령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나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명시적으로 기재한 문서는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구두 명령에 의해 5월 21일 500MD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충분히 추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가 계엄사의 1980년 5월 22일 8시 30분 헬기 작전계획 하달 문서(P57)와 5월 22일 09시 항공감 최O석이 소O열 전교사령관에게 보낸 ‘헬기 사용에 관하여’라는 서신(P59)이다. 김 판사는 이 문건들을 5월 21일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조비오 신부 증언의 신빙성이 높다는 증거로 삼고 있다.

5월 22일 08시 30분에 하달된 헬기 작전 계획 문서와 5월 22일 09시에 전해진 서신을 근거로 5월 21일에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추단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5월 22일 오전 8시 30분에 헬기 작전계획이 하달되었으니, 이 계획을 접수하고 작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조비오 신부가 증언한 헬기 사격 시간보다 최소 20시간은 지나야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

이 문서들은 조비오 신부의 증언을 부정하는 것인데도 김 판사는 거꾸로 조비오 신부의 증언의 신빙성을 높이는 증거로 삼고 있다.

 

9. 기밀 해제된 주한 미국대사관이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P64~P66)

 

검찰(조비오 신부측)은 기밀 해제된 주한 미대사의 보고서 43건의 문서에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그것을 증거로 제시했으나, 김 판사는 검찰이 영문 해석을 잘못하고 상황을 오해한 것으로 43건의 문건에는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고 볼 내용이 없다고 판단했다. 여기까지는 김 판사의 판단이 맞았는데, 그 뒤의 결론이 말이 되지 않는다. 김 판사는 주한 미대사의 보고 문건에 헬기 기총소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결론짓는다. 물론 김 판사의 결론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미대사 보고서 43건에 헬기 기총소사 언급이 없다는 것이 당시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에 배치한 군사 및 정보 자산을 고려할 경우, 만약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고 한다면 미대사 보고서에 헬기 기총소사 언급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CIA 한국지부도 있고 수 만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고 미국도 5.18 상황을 예의 주시했었는데, 1건의 보고서도 아니고 무려 43건의 보고서에 헬기 기총소사가 보고되지 않았을 리 있을까? 기총소사보다 경미하고 사소한 내용도 보고서에 담겨 있는데 헬기 기총소사를 보고서에 누락했을까? 헬기가 시민군의 대공 사격으로 피격당한 사실은 보고서에 나오는데 헬기의 기총소사를 보고서에 누락했을까?

 

10. 황O시의 헬기와 전차 동원 지시

 

김 판사는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근거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군참모차장 황O시가 전교사에 지시한 내용은 헬기 뿐아니라 전차도 동원하라는 것이었는데, 5.18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전차가 동원된 사실이 헬기가 동원되었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유력한 사정이다.(P66)”

황O시의 이 지시가 어떻게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가? 5.18 당시 헬기가 동원된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어느 누구도 부정한 적이 없다. 쟁점은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5.18 당시 헬기 뿐아니라 장갑차, 전차도 동원되었다. 그런데 전차에서 포나 기관총을 쏘았는가? 장갑차에서 기관총을 쐈는가?(5.21 13:00~13:30 시위대의 장갑차 급습으로 당황한 장교가 거치된 장갑차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겨 하늘을 향해 쐈던 것 이외에는 없다) 장갑차에서 기관총으로 실사격한 것도 없을 뿐아니라 위협 사격한 사실도 없다. 전차나 장갑차가 동원되었음에도 기관총 사용이 없었다는 사실은 헬기가 동원되었더라도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는가? 그런데 김 판사는 정반대로 추론하고 있다.

 

11. 헬기가 피격 당하면서도 반격하거나 보복하지 않은 것은 무얼 말하나

 

P66에 김 판사는 5.21 UH-1H 헬기 2대가 피격당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5.18 당시 헬기는 시민군으로부터 수차례 LMG와 카빈 소총으로 대공 사격을 당해 추락의 위험도 있었으나 대공 사격에 대응해 반격하거나 보복한 적이 없다. 5.18 관련 단체들의 모든 기록들에도 대공 사격을 했다는 증언들은 많지만 헬기로부터 공격당했다는 증언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무얼 말할까? 헬기가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기관총 사용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데 김 판사는 반대로 시민군이 무장하고 헬기가 피격 당했으니 계엄군이 헬기 기총소사를 할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이런 말은 도리어 헬기 기총소사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위험한 이야기임을 김 판사는 알까?

 

12. 전교사 정보처 일지의 헬기 요청 문건

 

P67에 보면, 김 판사는 ‘광주사태 시 전교사 정보처 일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문건에는 “1980.5.21. 15:00경 창평 예비군 훈련장에 30명, 경계병력보다 수 배의 폭도들이 무기를 탈취코자 함. 요망사항 : 500MD, UH-1H 지원 요”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며, 이는 무장한 500MD가 작전 수행에 참여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웃긴다. 가스살포기를 장착한 500MD 2대는 그 시각 즈음에 전남대 정문에서 폭도들을 가스 살포로 진압하는데 동원되었기 때문에 로켓과 기관총을 장착한 500MD는 창평 예비군 훈련장으로 출격했을 거라는 것이다. ‘광주 헬기 출동 내역’에 따르면 계엄사는 무장한 500MD와 가스 살포기를 장착한 500MD를 구분 운용한 것으로 나타남으로 가스살포기를 장착한 500MD는 전남대에 출동했음으로 창평 예비군 훈련장으로 출동한 500MD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P56 ‘광주 헬기 출동 내역’을 보면 5월 21일에 운용한 500MD는 8~9대로 그 중에 가스살포기를 장착한 500MD는 4~5대로 나온다. 전남대에 출동한 가스살포기를 장착한 500MD 2대를 빼더라도 2~3대의 무장하지 않고 가스살포기를 장착한 500MD가 2~3대 더 있었다. 가스살포기를 장착한 500MD 4~5대 모두가 출동하여 작전 수행중이라면 그나마 김 판사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단순 뺄셈만 하는 유치원생만 되어도 김 판사와 같은 논리를 펴지 않을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김 판사 말대로 무장한 500MD가 창평 예비군 훈련장으로 출동했다고 하더라도 출동한 사실이 기총소사를 했다는 증거가 되는가?

창평 예비군 훈련장은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데 전남도청으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15km 떨어져 있다. 창평면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없었고 기총소사 흔적도 없다. 그리고 당시 창평 예비군 훈련장에 무기 탈취를 위해 갔던 시민군들 중에 헬기 기총소사를 받았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없다.

더구나 창평의 헬기 출동은 조비오 신부의 헬기 목격과는 무관한 것으로 이 사건의 증거로 채택해서도 안 된다.

 

13. 헬기 사격 흔적 없고 부상자와 사망자가 없다는 사실은 의미 없다?

 

P68에도 김 판사의 황당한 논리가 계속 된다.

헬기 기총소사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가 한 명도 없고 기총소사 흔적도 없는 것은 당시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변호사측의 주장에 대해 김 판사는 부상자와 사망자가 없다는 것은 군중을 향해 실사격을 안 했다는 증거는 될지 몰라도 위협사격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런데 김 판사는 P37에서 P목사가 군중을 향해 기총소사를 했다는 증언을 신빙성이 있다고 채택했다. 5.21 헬기에서 실사격은 없었고 위협사격만 있었다고 전제한다면 P목사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기각했어야 한다. 김 판사는 앞에서는 채택하고 뒤에서는 기각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문제는 또 있다. 김 판사는 P57~P58에 1980.5.22.08:30분에 하달된 ‘헬기 작전 계획’을 인용했었는데 그 문건 마지막에는 ‘시위 사격은 20미리 발칸, 실사격은 7.62미리(기관총)가 적합‘이라고 나온다. 이 문건에 따르면 시위(위협) 사격을 했다면 20미리 발칸이었어야 한다. 발칸의 위력은 기관총과는 천양지차다. 만약 발칸 사격이 있었다면 피해 규모가 엄청 났을 것이고 사상자가 없었더라도 그 흔적은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발칸은 그 탄피만 맞아도 사망할 정도인데 탄피를 맞고 부상을 당했거나 사망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발칸 총격 소리나 피해 규모로 보아 수많은 목격자가 나왔을 것이다. 김 판사는 앞에서는 이 문건을 5.21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로 삼았으면 뒤에서는 위협사격을 발칸이 아닌 기관총으로 했던 것처럼 말한다.

 

14. 당시 군 조종사나 정비사의 진술은 헬기 사격 증언의 부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김 판사는 “(변호인측은) 당시 군 조종사나 정비사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은 현존하는 군인들의 진술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진술이 없었다면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부존재가 곧바로 증명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논리법칙상 오류가 있다.(P68)”라고 말한다.

여러분 중에 위의 김 판사의 말을 이해하는 분이 있으면 알기 쉽게 설명해 주기 바란다. 필자는 도무지 위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200여명의 군 조종사와 정비사 모두가 한결같이 40년 동안 헬기 사격은 없었다는 증언이 의미가 없을까?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몇 차례의 검찰과 국방부의 조사가 있었고 문재인 정권 들어 국방부가 5.18 특조위를 만들어 헬기 관련 당사자들을 전부 조사했지만 단 1명도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진술을 하지 않았다. 관련 당사자들을 전수 조사해서 나온 결과인데 이게 의미가 없단 말인가?

 

15. 1995년 검찰수사결과는 참고의 대상이 아니다?

 

김영삼 정권 시절 수행된 5.18 검찰수사결과보고서에는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김 판사는 이 검찰수사보고서는 “당시로서는 12.12 군사반란 이후 전두환의 국헌문란행위가 인정되는지 여부에 관한 수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5.18 기간 동안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가 문제가 되는 이 사건과 그 평면을 달리한다.(P70)”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검찰수사보고서는 5.18 전후의 상황 뿐아니라 5.18 당시를 전부 수사한 종합 보고서로, 5.18 기간 동안의 내용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5.18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조사한 보고서다. 헬기 기총소사 문제만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헬기 기총소사 부문을 가볍게 다루거나 조사를 면밀히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헬기 기총소사 부문을 조사하려면 전후 사정과 맥락을 알아야 기총소사 여부를 판단하기 쉽기 때문에 5.18 전반을 수사했던 당시의 보고서가 오히려 더 의미가 있다.

더 웃긴 것은 김 판사도 이 검찰수사보고서를 많이 인용하여 판결문을 썼으면서도 유독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는 보고서 내용만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일관성이 없다. 김 판사는 같은 이유로 헬기 기총소사 부문 외에 다른 부문의 검찰수사결과보고서 내용도 배척했다면 그나마 일관성은 인정하겠지만, 아무런 기준 없이 김 판사 임의대로 수사결과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법조인의 자세는 아니라고 본다.

 

16. 5.27의 헬기 사격과 조비오 신부의 5.21 헬기 기총소사 목격 증언

 

김 판사는 조비오 신부가 주장하는 5.21의 헬기 기총소사의 물적 증거(사망자 및 부상자, 피해 흔적, 탄흔)가 하나도 나오지 않자, 전일빌딩 10층의 탄흔이 5.27 계엄군의 시민군 진압과정 중에 헬기 기총소사를 해 발생한 것이라고 말하며, 5.27의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음으로 이는 5.21에도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간접 증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설사 5.27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어떻게 시간을 거슬러 5.21의 기총소사의 증거로 삼을 수 있나? 전후의 사건 발생시간이 바뀌어 있다면 혹 그런 주장에 수긍할 수 있겠지만.

 

이제부터는 전일빌딩의 탄흔들이 5.27 헬기 기총소사에 의한 것인지 따져 보자.

 

17. 국과수의 감정결과는 믿을 만 한가

 

김 판사가 인용하는 국과수의 감정결과는 의문투성이다.

 

1) 헬기가 호버링 상태에서 기총사격해서 전일빌딩 탄흔을 남길 수 있나

국과수 감정결과를 보면, 전일빌딩 10층에는 바닥, 벽, 기둥, 텍스, 텍스 위의 공간에 202개의 탄흔이 있다고 나온다.

탄흔의 생성방향으로 보아 외부에서 헬기가 호버링 상태에서 하향 75도(바닥 탄흔, 탄흔 번호 A05-043), 상향 5도(천장 텍스 탄흔)로 기관총을 사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HU-1H는 M60 기관총을 외부에 거치할 수 있고 하향 82도, 상향 6.5도, 좌우 88도로 기관총 사격이 가능하며, 500MD는 기관총이 왼쪽 측면에 장착되어 있어 사격 각도는 상향 10도, 하향 24도, 좌우 0도라고 김 판사는 적고 있다.(P33)

이 지점에서 하나 짚고 넘어 가자.

5.21의 조비오 신부가 목격한 헬기는 500MD인데 왜 김 판사는 5.27의 전일빌딩에 기총소사한 헬기는 한사코 HU-1H라고 단정하는 것일까? 하향 75도 각도로 사격한 탄흔이 있다고 했음으로 하향 24도까지만 사격이 가능한 500MD는 제외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그나마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HU-1H의 거치형 기관총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HU-1H의 기관총도 75도 하향 사격이 가능할까? HU-1H 기관총이 하향 82도가 되는 경우는 비행시에 거의 수직으로 거치되는 각도이지 실제 사격 시에는 75도 하향 사격은 불가능하다.

아래에 링크한 UH-1H M60 도어 건 장치 모습을 보라.

https://blog.naver.com/wkfyd0188/220190865641

 

HU-1H의 기관총은 헬기 외부에 거치되어 있다. 헬기의 기관총 사수가 하향 75도로 사격하려면 앉아서 쏠 수 없어 안전 벨트를 풀고 일어나야 하며, 머리와 상체가 헬기 밖으로 나와야 가능하다. 사수가 이런 자세로 사격을 하면 헬기에서 떨어지게 된다. 75도 하향 사격을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김 판사는 HU-1H에 거치된 M60 기관총으로 75도 하향 사격이 가능한지 헬기 조종사 등 군관계자들에게 확인을 해 보았는가?

 

김 판사는 헬기가 호버링(일정 고도를 유지한 정지 상태) 상태에서 전일빌딩에 기총소사를 했다고 말한다. P77 <탄흔의 좌우 방향 분석표>를 보면 호버링 상태에서 기관총을 사격하여 좌우 방향에 나타난 탄흔을 표시하고 있다.

문제는 호버링 상태에서 사격했다면 좌우 방향의 탄흔은 설명할 수 있지만 상하 방향의 탄흔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김 판사는 상하 방향의 탄흔을 설명하는 표는 제시하지 않은 것 같다.

상향 5도 각도로 사격해 천장 텍스에 탄흔을 만들려면 헬기는 천장보다 0.92m 아래에 위치해야 한다. 그리고 UH-1H 헬기의 전장은 약 17m, 프로펠러 지름이 약 14m로 헬기의 안전을 위해 전일빌딩 외벽으로부터 최소 10m는 떨어져 사격해야 한다.

외벽과 천장 텍스 탄흔까지 거리 ; 30cm, 외벽의 두께 ; 20cm, 외벽과 헬기간 거리 : 10m(1,000cm), 헬기 기관총과 천장 텍스 탄흔까지의 수평 거리 = 30cm+20cm+1,000cm = 1,050cm(10.5m), tan5도 = 0.0875, 따라서 천장 탄흔과 헬기 기관총까지의 수직거리는 1,050cm*0.0875 = 92cm(0.92m), 헬기는 전일빌딩 10층 천장보다 92cm 아래에서 호버링한 상태에서 사격했다는 뜻이다.

다음은 하향 75도 사격하여 바닥에 탄흔을 내려면 헬기의 위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계산해 보자.

외벽과 바닥 탄흔까지 거리 ; 30cm, 외벽의 두께 ; 20cm, 외벽과 헬기간 거리 : 10m(1,000cm), 헬기 기관총과 바닥 탄흔까지의 수평 거리 = 30cm+20cm+1,000cm = 1,050cm(10.5m), tan75도 = 3.7321, 따라서 바닥 탄흔과 헬기 기관총까지의 수직거리는 1,050cm*3.7321 = 3,918cm(39.18m), 바닥에 탄흔을 낸 헬기는 전일빌딩 10층 바닥으로부터 39.18m 위 상공에서 호버링 상태에서 사격했다는 것이다.

전일빌딩 10층의 바닥과 천장 텍스까지의 수직거리가 약 2.7m 정도이니까 바닥에 난 하향 75도 탄흔을 낼 때의 헬기의 고도와 천장 텍스에 난 상향 5도의 탄흔을 낼 때의 헬기의 고도 차이는 (39.18m+0.92m)-2.7m = 37.4m이다.

37.4m 고도 차이가 나는데 호버링 상태라 할 수 있는가?

호버링 상태가 아니라 헬기가 37.4m 고도를 순간적으로 높여가며(혹은 낮춰가며) 기관총 사격각도를 상향 5도에서 하향 75도로 아래 위로 돌리면서 드르륵 사격을 했다 하더라도 저런탄착망은 절대 나올 수 없다. 호버링 상태에서 기관총의 상하 좌우 각도를 고정한 상태에서 사격하더라도 저렇게 조밀한 탄착망을 낼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헬기는 호버링 상태라도 순간순간 좌우, 상하로 움직임이 있고, 또 헬기 자체의 진동이 있기 때문에 호버링 상태에서 상하좌우 사격 각도를 고정한 상태라도 저렇게 조밀한 탄착망이 형성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호버링 상태에서 기관총을 상향 5도에서 하향 75도로 사격했다면 반드시 창 쪽 외벽의 반대쪽 출입구 쪽 내벽에 탄흔이 발견되어야 한다. 수평(사격 각도 0도) ~ 하향 20도 사이에서 발사된 총탄은 창을 뚫고 반대편 출입구 쪽 내벽을 타격했을 것이다. 외벽과 기둥, 천장 가로보에는 탄흔이 발견되었는데 출입구 쪽 내벽에는 탄흔이 하나도 없을 수 있는가?

 

김 판사도 국과수가 천장 텍스에 난 탄흔을 헬기 기총소사에 의한 것이라고 본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천장 텍스 탄흔은 헬기가 아니라 시민군이나 계엄군이 외부에서 소총으로 쏜 탄흔이라고 말한다. 김 판사는 헬기가 지상의 대공 사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전일빌딩 10층 높이보다 낮게 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 김 판사의 말도 문제가 많다.

헬기가 아닌 외부의 지상이나 건물에서 소총으로 쏜 것이라면 전일빌딩으로부터 300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쏴야 상향 5도의 탄흔을 발생시킬 수 있다. 더구나 기둥의 상단부와 가로보의 탄흔은 거의 수평(사격 각도) 사격으로 난 자국이라고 국과수는 말하고 있고, 또 김 판사의 논리대로 헬기에서 사격했다면 이 수평각의 사격에 의한 탄흔이 있어야 한다. 지상에서 상향 1도 사격 흔적이라면 전일빌딩에서 1.7km 떨어진 곳에서 쏜 것이 된다. 카빈 소총의 유효 사거리는 200~250m이고, 최대 사거리는 2,000m(2km)이다. 따라서 상향 수평 ~ 5도의 탄흔이라면 외부의 지상이나 건물에서 사격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헬기 사격에 의한 것도 아니고 외부 지상이나 건물에서 쏜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얼까? 국과수가 천장이나 가로보, 기둥의 최상단부에 난 탄흔의 사격 각도를 잘못 측정한 것이라 봐야 한다. 이 부위들 뿐아니라 국과수가 밝힌 기둥과 외벽의 탄흔 각도도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헬기의 기총소사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증거들을 끼워맞추기 하다 보니 상호 충돌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진상 나타나는 기둥 전면의 탄흔과 가로보의 탄흔들은 모양과 타격 정도가 비슷해 동일한 총기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닥 탄흔을 제외한 모든 부위의 탄흔들은 외벽으로부터 모두 1m 이내에 있다. 국과수의 탄흔 각도를 무시한다면 이 탄흔들은 외부의 지상에서 전일빌딩 10층을 향해 사격했을 때 나올 수 있는 탄흔이다.

 

2) 전일빌딩의 탄흔은 M60 기관총 7.62mm 총탄에 의한 것이 맞는가

202개의 탄흔은 7.62mm(0.3인치)와 5.56mm의 총탄 흔적으로 보인다고 말하나 202개 각각에 대한 탄흔을 분석한 표는 없다.

사진상에 나타난 기둥의 탄흔들을 보면 기관총보다는 M16이나 카빈 소총의 탄흔으로 보인다. 기관총 사격에 의한 것이라면 저렇게 얕은 곰보 자국처럼 보일 수 없고 훨씬 크고 깊게 파였을 것이고 탄흔 뿐아니라 박혀 있는 총탄도 나왔을 것이다.

국과수가 밝힌 5.56mm 탄흔은 M16의 사격에 의한 것이고, 카빈은 7.62mm로 M50 기관총 탄압의 직경과 같다. 7.62mm 탄흔으로 밝힌 이 탄흔이 카빈 소총에 의한 것인지, M60 기관총에 의한 것인지 국과수는 밝히지 않고 있다. 같은 7.62mm 총탄이라도 카빈과 M60의 위력은 엄청난 차이를 보여 절대 똑같은 탄흔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더구나 시민군이 전일 빌딩 10층을 향해 쐈던 카빈의 탄흔은 사격거리가 100m가 넘는 반면,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면 그 거리는 20m 내외였을 것임으로 타격 위력의 차이는 더 컸을 것이다. 이런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국과수는 왜 7.62mm 탄흔의 총기를 구분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3)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탄피는 M60 기관총 탄피인가?

국과수는 0.3인치(7.62mm)와 5.56mm 탄피가 전일빌딩 10층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이 탄피들은 당시에 사용된 실탄의 탄피일 가능성이 인정되며, 0.3인치 탄피는 관련성 논단이 불가하다는 애매한 표현을 써 놓고 있다.

국과수의 발표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전일빌딩에서 발견했다는 7.62mm의 탄피(탄환)의 총기를 식별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5.56mm는 계엄군이 사용한 M16 소총의 탄환이다. 수거된 탄피(탄환)가 당시 생산했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탄환의 총기는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카빈 소총 탄환과 M60 기관단총 탄환의 구경은 7.62mm로 똑같지만, 길이는 33mm와 51mm로 큰 차이를 보인다. 당연히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탄피가 카빈 소총의 탄환(탄피)인지 M60 기관총 탄환(탄피)인지 식별이 가능한데 국과수는 이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다. 만약 탄피가 51mm로 확인이 되었다면 이것이야말로 기관총 사격의 결정적 증거가 되는데 국과수가 이걸 밝히지 않았겠는가?

 

18. 5.27 전일빌딩 헬기 사격을 목격한 증언들의 신빙성

 

김 판사는 5.27 새벽 전일빌딩에 헬기 사격하는 장면을 목격한 네 개의 증언 중에 둘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나머지 둘은 채택했다. (P84~87)

그런데 김 판사가 채택한 증언 둘에도 심각한 하자가 있다.

이O석의 증언에 따르면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3번 사격했다고 나온다. M60 기관총을 세 번 사격하면 탄착군이 3개가 나와야 정상이다. 호버링 상태에서 기관총의 상하 좌우를 고정시켜 3번 사격하더라도 헬기의 진동과 좌우상하의 약간의 움직임으로 인해 하나의 조밀한 탄착군을 형성할 수 없다. 심지어 헬기가 고도를 40m 가량 움직이는 가운데 기관총을 하향 75도에서 상향 5도로 상하로 방향을 바꿔가며 사격했다면 전일빌딩의 탄흔처럼 절대 나타날 수 없다.

박O선의 증언도 전일빌딩에 나타난 탄흔을 설명할 수 없어 신빙성이 없다. 박O선은 전남도청 정문과 본관 사이에서 헬기가 전일빌딩을 향해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전일빌딩과 전남도청 정문까지 거리는 100m가 넘으며 거의 나란히 있어 박O선의 증언대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전일빌딩 10층에 있는 탄흔을 절대 만들어 낼 수 없다. 국과수는 물론 김 판사도 전일빌딩의 탄흔은 헬기가 빌딩의 창 정면 방향에서 사격한 것이라고 했다.

김 판사가 자신의 판단과 상충하는 위 두 명의 증언을 신빙성이 있다고 증거로 채택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 쟁점을 ‘헬기 기총소사’에서 ‘헬기 사격’으로 옮겨 놓고 ‘헬기 레펠 강하 M16 사격 가능성’은 배제하는 모순

 

P89를 보면, 김 판사는 전일빌딩 10층의 탄흔은 헬기에서 레펠 하강하면서 M16을 사격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고 헬기 기총소사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너무나 궁색하다. 군 관계자들이 5.27 진압시에 헬기 레펠 하강은 없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군 관계자들은 헬기 기총소사를 하지 않았고 레펠 하강도 없었다고 진술했는데, 전자는 무시하고 후자만을 인용하여 저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더욱 웃긴 것은 김 판사가 P28에서 쟁점을 ‘헬기 기총소사’에서 ‘헬기 사격’으로 자의적으로 변경(3항 참조)했으면서 ‘헬기 사격’이 가능한 ‘헬기 레펠 강하 사격’은 이제 와서 부정한다는 것이다.

레펠 강하 사격시에는 하향 75도 탄흔과 상향 5도의 탄흔이 설명이 되고 바닥의 탄흔도 설명이 되어 오히려 군 관계자들이 ‘헬기 기총소사’와 ‘헬기 레펠 하강 사격’을 부정하는 상황이라면 전자보다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김 판사는 굳이 ‘헬기 기총소사 ’ 쪽으로 몰아가려 안달일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김 판사의 판결문은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춰 모든 상황을 해석하고 끼워 맞추고 있으며, 자신이 정해놓은 결론에 반하는 증거들은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기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논리적 정합성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 사실을 왜곡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관련 글

<5.18 헬기 기총소사, 광주지법 인정 판결을 보며>

http://road3.kr/?p=39732&cat=161

 

<조비오 신부 헬기 기총소사 증언에 대해#1>

http://road3.kr/?p=14446&cat=146

 

<조비오 신부 헬기 기총소사 증언에 대해#2>

http://road3.kr/?p=14449&cat=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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